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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칼럼

“고흐란” 이야기

2021.12.07 13:46

UGN 조회 수:5394

러시아, 특히 모스크바에 가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어디일까? 내부 장식이 모두 호박(Amber) 보석으로 장식되어 불가사이중 하나인 호박방이 있는 예까쩨린 궁전, 황금빛 돔으로 도시의 랜드마크인 성 이삭성당, 세계 3대 박물관중 하나인 에르미타쥐 박물관, 혹은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장? 당연히 크렘린궁일 듯 하다.
 
우주펜스키(성모승천) 블라고베시첸스키(수태고지), 대천사 미카엘 등 15 -16세기에 건축된 3개의 대 성당을 보유한, 크렘린궁 자체도 대단한 볼거리인데다 레닌 묘와 러시아의 상징적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바실리 대성당이 위치한 붉은 광장도 끼고 있다.
 
그러나 크렘린궁에 가면 빠뜨리기 아쉬운 것으로 또 하나의 볼거리가 있다. 바로 “고흐란” 이란 곳인데 우리말로 하면 “국가 보관소” 이다. 이름으로만 보면 무언가 잡다한 국가기밀품 등을 소장한 곳으로 느끼기 쉽지만 제정러시아 시절 황제와 황실의 보물들 특히 금은 세공품, 러시아 왕족의 마차, 이들이 갖고 있던 각종 크기의 보석과 다이아몬드들을 한곳에 보관한 곳이다.
 
1920년 소련의 권부 즉 볼셰비키들이 황실 보석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곳으로 지금은 ‘알마즈느이 폰드’ 혹은 “Diamond Fund”로 불린다. 고흐란은 볼셰비키들이 황제와 전 황실 재산 몰수령이 내린뒤 설립되었다고 한다. 왕관의 보석들 (거대한 왕관, 보석 구슬이 달린 십자가, 홀, 다이아몬드 목걸이)은 1914년 상트페데르부르크에서 크렘린으로 이송된 상태로 당시 전국 각지에 있던 황족들의 개인 보석들이 몰수 대상이였다. 일부 보물들은 몇몇 망명 황족들에 의해 해외로 반출 되기도 했다. 볼셰비키들은 전세계적으로 혁명의 불길을 지피고 황폐해진 국가에서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다른 국가들은 소련 연방을 인정하지 않았고 소련 연방과 거래하거나 돈을 빌려주길 원치 않았다. 이 과정에서 황실의 보물들이 빠져 나갔다.
 
보석 반출과 밀수가 공공연히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외교 행랑이나 공산주의 인터네셔널 (코민테른)을 통해 반출이 이루어 졌다. 수많은 보석들이 코민테른 서유럽 지국이 있던 독일로 반출됐으며 이 일을 레닌의 명령서를 가진 제임스라는 가명의 모험가가 주도 했다. 그는 미적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눈으로 봐서 큰 보석들만 한 움큼씩 가방에 쑤셔 넣코 나갔다. 금붙이들은 덩치가 커 반출 대상에서 원칙적으로 제외됐다.
 
당시 소련에서 얼마나 밀반출 또는 비공식 거래가 성행했는지는 제 1차 세계 대전중 특파원으로 유럽에 가있던 미국의 평론가이자 칼럼리스트 존리드가 자신의 높은 구두창속에 다이아몬드를 숨겨 나가려다 세관에서 붙잡혔던 일화로 알려지기도 했었는데 리드는 레닌의 친구였다고 한다
 
이처럼 반출을 원활히 하기위해 화려한 왕관들에서 보석을 뽑아내는 등 당시 사진들이 여전히 문서 보관서에 남아 있다고 한다. 에술성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왕관까지도 팔려는 시도도 있었다. 예카떼리나 대제때 러시아가 얼마나 위대하고 부유한 나라인지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것으로 5,000개의 다이아몬드와 70개 이상의 흠없는 진주 그리고 무려 400캐럿짜리 붉은 색 스피넬로 만든 왕관이다. 이 왕관은 대대로 이어져 로마노프왕조 최후의 황제인 니콜라이 2세까지 내려온 보물이다. 당시 소련 군부는 “황제가 우리를 강탈했지만 이제 모든 강탈품이 노동자와 농민에게 귀속되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려고 “고흐란의 보물” 을 전시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1927년 12월 엄동설한에 이보물들을 보기 위해 긴줄이 늘어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고 한다. 그러나 특명은 다른데 있었다 바로 “구매자를 찾아라”는 건데 모스크바 주재 외교공관원들이 당시 모두 전시장을 찾았지만 특별한 제안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당시 9킬로그램 상당의 보석이 ‘베이스”라는 무역회사에 팔렸고 이들 보석은 바로 2년뒤에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 나왔다. 이중에는 니콜라이 2세의 아내 즉 최후의 황비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의 왕관과 결혼식용 왕관의 보석 약 120점도 포함됐다.
 
보석의 수거와 판매과정은 역사와 예술에 일말의 존경심도 없는 일자무식꾼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오히려 황족과 관련된 것이라면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들이였다. 이런 만행은 당시 소련 통상부 인민회(장관)에 의해 저지됐다. 그는 귀중한 보석들이 너무 헐값에 팔려 나가는데 격분했다고 한다. 마침내 스탈린 역시 1934년 반출을 금지하기에 이른다. 아마 스탈린이 “황실의 자질구레한 장신구들”의 예술성이나 역사적 가치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익이 적은데 반해 공산당의 위신은 크게 손상되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적으로는 국제적인 정치, 경제적 봉쇄에서 벗어나 국가산업화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스탈린은 소련이 서방의 눈에 더 이상 야만적으로 비쳐지길 원치 않았을 것이다. 당시 얼마나 많은 보석이 사라졌는지 파악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다만 왕관의 보석들에 관해서 만큼은 다소 파악되고 있다. 773점의 왕관이 있었는데 오늘날 “알마즈느이 폰드”에서는 114점만 볼 수 있다. 보석 반출이 중단된 이후 “고흐란”은 왕가의 보석 유지와 환수에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 결과 현재 외국인들이 모스크바에서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크렘린에 있는 전설적인 알마즈느이 폰드이다.
 
알마즈느이 폰드, “고흐란”은 크렘린 입구 “무기고 박물관” 안에 있다.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일이 있으면 한번 찾아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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